관련 역사적 사실
전봉준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23일 아침 노성을 떠나 한낮에 이인(利仁)으로 북상했다. 동학군은 이인의 수성군보다 20배가 넘었지만, 훈련이 부족했고 무장이 저조한 상황이었다. 동학군이 회선포(回旋砲)를 쏘며 공격해오자, 성하영이 진격나팔을 불고 반격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이 주봉에서 사격하는 가운데, 구완희가 남월촌(南月村)에 있는 동학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리청 군이 세 갈래로 협공했다. 동학군이 이인 뒷산(翠屛山)으로 올라가자, 관군 일본군도 산으로 올라갔으나 수가 적어 더 전진하지 못하고 포를 쏘며 대치했다. 이인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관군은 음력 10월 23일 이인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이것이 ‘이인전투’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한 때 이인역을 탈환하여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산에 올라가 대포를 쏘면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집중사격을 가하며 다시 이인역을 점령했기 때문에 일본군과 관군은 패전했고, 충청도 관찰사의 후퇴명령에 기탁하여 웅치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 이인전투에서는 동학농민군이 크게 승리했으며, 일본군과 관군은 전사자 약 120명과 부상자 약 300명을 내고 참패하였다.
이인전투는 공주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첫번째 전투이면서 동시에 동학농민군의 큰 승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