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선산지역에서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1894년 여름부터였으며, 김천, 상주, 예천 등지의 농민군과 서로 연계해 가면서 활동하였다. 선산 지역 농민군 지도자나 조직, 구체적인 활동상을 자세히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민란 당시에도 경상도의 상주·선산 등지의 농민들이 관아의 병기를 빼내어 무리를 모아서 합세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동학이 포교되었고, 농민군의 활동도 활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선산 농민군은 9월 22일 상주의 농민군이 상주성을 점령하였을 때도 일부 가담하였다. 선산농민군이 관아를 점령한 것은 9월 20일 이후 무렵이었고, 여기에는 김천지역 농민군도 합세하였다. 김천 지역에서는 8월부터 활발해졌으며, 충경포·상공포·선산포·영동포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진목(眞木, 참나무골)의 편보언(片輔彦)은 8월에 들어 스스로 ‘도집강(都執綱)’ 이라고 칭하고 김천 시장에 도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 활동을 해나갔다. 9월 25일경에는 최시형으로부터 군사를 일으키라는 통지가 오자 김천지역의 접주들에게 사통(私通)을 보내 농민군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여러 고을을 횡행하여 곡식과 말을 빼앗고 창과 검을 거두며 기세를 올렸다. 또한 김천의 농민군은 선산부를 점령하는 데도 앞장섰다. 선두에 선 것은 양반들이 시회를 즐기던 감호정(鑑湖亭)의 고직이[庫子] 출신인 기동(耆洞)의 김정문(金定文)이었다.
선산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하자 선산의 향리들이 몰래 낙동의 일본 병참부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일본군은 10월 1일 선산성을 점령해 있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김천의 접주 김정문 휘하의 농민군 15명을 포함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선산성에서 퇴각하였다. 이때 선산성을 공격한 일본군은 낙동병참부의 병력과 부산수비대에서 파견된 후지타(藤田)부대였다. 후지타는 하사 4명, 병졸 60명, 통역 2명, 인부 10명을 이끌고 8월 29일 낙동에 도착한 후 낙동병참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일대의 농민군 진압에 투입되었다. 그의 부대는 9월 29일 상주성을 공격하여 농민군을 몰아 낸 이틀 후인 10월 1일 다시 선산성을 공격한 것이다.
이후로 선산 농민군이 다시 성을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곳곳에서 농민군들의 활동은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대구 감영에서는 병정 2백명이 김산·지례 방면으로 파견되어 농민군 탄압에 나섰고, 11월 10일경에는 “거괴(巨魁)” 신두문(申斗文)이 선산부에 체포되면서 농민군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선산관아에 수감되어 있던 신두문은 12월 14일 상주 소모영의 소모사 정의묵에 의해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