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군이 9월에 재봉기한 뒤 여러 세력이 청주읍성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10월 17일 청주 대접주 김자선(金子先)은 4,500명을 이끌고 청주성을 공격하고자 이동하였다. 그는 청주 병영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상당산성으로 우회해서 초정리 부근의 가는다리(細橋) 장터까지 진출하였다. 이곳은 초정 입구 한봉수 의병장의 묘소 근처로 바로 근처에 손병희의 생가가 있는 대교리와 맞닿아 있는 중요지점이었다.
그러나 김자선부대는 10월 26일 일본군과 맞닥뜨리게 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김자선부대는 결국 무기의 열세로 패한 뒤, 김자선의 고향인 보은 장내리쪽으로 후퇴하였다. 김자선과 그의 동지들은 장내리와 경북 상주 등지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결국 11월 18일 상주 유격병대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고증내용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등에서 세교 전투에 대한 기록이 확인되며, 세교가 있던 자리에 1996년에 완공된 길이 6m, 폭 9m의 ‘세교1교’가 놓여 있으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안내문이나 표지석은 없다. 현재 세교1리노인회관 주변지역이 옛 장터로, 이곳 주변에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