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관군과의 최대의 전투를 벌인 세성산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동학농민군들 이외에도 전투에서 패배하여 흩어져 피신한 동학농민군들도 진압병력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전투가 끝나고도, 관군은 마을 곳곳을 수색하고 동학농민군을 색출하여 많은 수를 학살하였다. 일명 ‘동학농민군 집단 처형지’ 라고 불리는 곳은 병천리 서원말과 도원리 면실과 광텃골 3곳이 전해지고 있다.
최시형의 재기포령으로 인해, 천안 일대 동학농민군은 최초로 서원말 뒤편의 작성산에 집결하였다. 당시 이희인 접주가 작성산 북동쪽의 매당리에 주둔지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는 증언이 전해오고 있다. 세성산전투에서 피신한 이희인 접주는 매당리에 은신해 있다가 부상이 심해져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원말에 있는 처가에 은신하였다. 하지만 바로 서원말에서 신원이 노출되어 체포되었고, 서원마을은 진압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피해를 당했다.
다음으로 도원리의 면실은 ‘실학에 근면하라’ 는 뜻이 담긴 마을이다. 병천면에서 전통시대부터 중심 마을이었다. 현재는 병천시장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지만,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면실마을이 병천 일대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동경대전 간행에 큰 역할을 한 김은경의 본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몇몇 지역 주민들은 면실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봉항천 하류의 넓은 들판에 자리잡은 지리적인 특성상 관군들의 통제에 그대로 노출되어 간행소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된다. 이 마을은 세성산전투 이후 진압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피해를 당했다.
도원리 면실 이외에도 면실마을의 위쪽에 위치한 광텃골도 대표적인 집단 처형지이다. 광텃골은 동성산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으며, 대대로 지역 유림들이 세거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 목천현 일대의 유림들의 회합장소로 기능한 노은정이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 뒤편 언덕에서 세성산전투 이후 체포된 동학농민군들이 줄줄이 포승줄로 묶여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