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72년 해월 최시형과 강시원, 전성문 등이 무은담 유시헌가로 피해 오면서부터 1870년대 동학 교문의 비밀 포교지가 되었다. 그해 10월 갈래산 적조아에 수련차 입산하던 해월 일행의 식량 등도 무은담 유시헌가를 중심으로 조달되었다. 1875년 설법제, 1976년의 구성제 등 동학 의 새로운 종교의식이 이곳에서 행해졌으며1879년 7월에는 수운 당시 개접하였다가 파접한 이후 열리지 못한 동학의 정기 수련회를 다시 여는 개접례가 행애짐으로써 무은담은 동학 교문 재 건의 한 전기를 이루는 곳이다.
1880년대 동학이 충청.전라도로 퍼져 갈 때 이곳은 도소로서 역할을 했다. 1894년 관군의 공격으로 수 많은 농민군이 이곳에서 희생되고 접주 유시헌의 집도 머리재 마을로 피신 한 뒤 동학도소로서 역할도 끝났다.(박맹수, <<개벽의 꿈>>164-165쪽) ㅇ1999년 4월에 정선군 남면 광덕리 수령마을 입구에 ‘동학도접주 정암 유시헌 선생 행저비’가 세워졌고 뒷면에 행적을 밝히고 있다.
“동학 도접주 유시헌 선생은 서기 1843년 1월 15일 정선군 남면 유평리에서 출생하니 자는 도원 행명은 인상 보명은 시진 호는 정암이며 동학사상을 신봉하던 도인이었다. 2세도주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은거지로 정암자택을 정하고 주야로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협의하며 해월의 12시자 반포로 도포덕주 최시형, 차도주 강시원, 도접주 유시헌 김시명 심시정 신시영 신시일 최시경 홍시래 전시황 방시학 조시철 등은 시자개명과 고락을 결의하며 이때 은밀히 도세는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유시헌 선생은 설법제 기도 등 주요행사의 주도적인 역할로 정선의 동학 역사를 청조한 선각자로 동학혁명시 1894년 10월 정암부인 최씨는 평창에 투옥되었다가 4개여월의 옥고 끝에 방며되었꼬 차남 학종은 영월에 투옥되어 부친의 거소를 대라는 심한 고문에 ”나의 부친은 나의 하늘이니 하늘에 서 찾아보라“며 실신하여 12월 19일 26세로 세상을 등졌고 장남 택하는 사슬에 묶인 채 ”도중 진들을 찾으라“며 사방으로 끌려다니다 탈출하였다.
정암은 1895년 1월 27일 신동 운치리에서 검거되어 평창에 투옥되었다가 문인들의 상소로 방면되었으며 수년간의 은거생활로 가산을 탕진 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1897년 7월 수령(초두평)에 정착하였다가 1904년 11월 14일 조하니 묘는 수령배 고개 상단이시다. 서기 1999녀 4월 5일 건비 손부 영재의 처 허경 추진 유돈생 돈희 돈학” 정선군 남면 강덕2리에 유시헌의 묘고가 있다.
고증내용
<도원기서> <천도교회사초고><천도교창건사><동학도종역사> <시천교종역사> <본교역사> <천도교서>
그 남은 무리들 중에 최시형(崔時亨, 동학의 2대 교주) · 강시원(姜時元) · 유시헌(劉時憲) · 김시찬(金時贊) · 전시명(全時明) · 김중삼(金仲三) · 성두한(成斗漢) · 김선달(金善達) 등은 성명(姓名)을 바꾸고 사방으로 몸을 숨겨 동학도인(東學道人)이라고 칭하며 ≪ 사람을≫ 선동하고 꾀어 주문(呪文)을 주니 인민(人民)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내치지 를 못했고, 조정은 감싸서 타이르며 토벌하지 않았다. 완악한 저 비류(匪類)는 이것을 믿고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며 편하게 거괴(渠魁)를 위하여 대궐 밖에서 억울함을 호소 하였다.(<정운경가 동학고문서>)
비괴인 성두한 유도원 등은 기한 내에 뒤를 밟아 잡아들여 뒷날의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라. (<동비토론>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429-430 쪽)
19992년 3월 6일 필자가 답사를 갔을 때 최씨(최우규)는 “이곳이 동학도소가 있었던 터라는 말씀을 어려서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천도교단의 표영삼 상주선도사가 조 사한 바에 의하면 대지가 201평이라 한다. (박맹수 <<개벽의 꿈>> 모시는 사람들, 2011, 163쪽)
2016.5.19. 정선문화원과 정선군향토사 연구소에서 ‘동학유적지 무은담’을 알리는 알리는 표지판과 집터에 ‘동학유적지 무은담터’ 돌비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