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2월 15일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진도로 피신하기도 함. 이에 1896년 12월 26일 경군(京軍)과 일본군 1개 지대가 진도 벽파진에 상륙함
이들은 곧 12월 27일 진도 읍내에 도착하였고 동학농민군에 대한 체포와 처형을 시작함. 그리고 12월 30일 전라우수영으로 철수함
「순무선봉진등록」에 따르면 경군과 일본군이 상륙하기 이전에 이미 손행권(孫行權), 김수종(金秀宗), 이방현(李方鉉), 김윤선(金允善), 주영백(朱永白), 김대욱(金大旭), 서기택(徐奇宅) 등이 체포되었음. 그리고 27일 진도 읍내에 경군과 일본군이 도착한 후 이들에 대한 처형이 시작됨
진도읍 성내리 박주언(朴柱彦)과 송현리 소문영(蘇文永)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군 약 30여 명이 (진도)수성군에 타살되어 남문 밖에 내버렸다가 썩은 냄새가 나서 솔계치(率溪峙)에 내다 버렸다’라고 언급함
고증내용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5년 1월 초 2일. 25일 해남에서 군대를 주둔한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나주에 있을 때에 일본 진영의 지휘로 능주로 파견한 교장 황수옥이 거느린 병사 30명이 장흥을 토벌한 후에 24일 일본 진영 소위와 함께 본 읍에 와서 주둔하다가, 26일 일본 소위와 함께 우수영(右水營)·진도 등지로 갔습니다.…(중략)…28일 아무 폐단 없이 머물렀고, 본 읍에서 못된 짓을 한 동괴 10명은 본 읍의 각 마을에서 잡아왔기 때문에 그날로 총살하였습니다. 29일 일본 보병대위 마스끼 세이보는 우수영 등지를 향해 진군하여 일본 병사는 단지 18명만 남아 있으며, 이미 일본 대위의 지휘가 있어서 본 진영은 잠시 군대를 머물러 주둔하면서 회군한다는 말이 있기를 기다립니다.
「선봉진정보첩」: 행 진도도호부사가 첩보합니다(개국 503년 12월 30일). 본부(本府)의 경내에 있는 비류(匪類) 손행권(孫行權)과 김수종(金秀宗) 두 놈을 잡아서 가둔 것에 대한 연유를 전번에 이미 치보(馳報)하여 ‘읍(邑)으로부터 결정해서 처리하라’는 제교(題敎)를 삼가 받았거니와, 각별히 추적 정탐 끝에 뒤쫓아 가서 이방현(李方鉉), 김윤선(金允善), 주영백(朱永白), 김대욱(金大旭), 서기택(徐奇宅) 등을 붙잡아 아울러 엄격히 가두고 자세히 조사한 다음 보고해서 처치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달 26일 경군 영관(京軍領官)이 병정을 거느리고 경내에 들어와서 벽파진참(碧波津站)에서 유숙하고 다음 날 27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무렵 읍참(邑站)에 이르러, 본부의 성을 지키는 군인과 백성들을 모두 헤쳐 보내고 갇혀있는 죄인들을 차례로 취조한 뒤에 손행권, 김윤선, 김대욱, 서기택은 민중 앞에서 죄의 경중을 따라 처단하고, 나머지는 모두 훈방하여 각각 본업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