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2월 15일 석대들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이후 전남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피신을 위해 흩어짐. 일부는 진도 일대로 피신함
좌선봉진군은 1894년 12월 17일 진도와 가까운 거리인 해남 우수영에 도착하여 주둔하였고, 12월 19일에는 통위영병(統衛營兵)도 해남에 도착함. 이들은 해남, 강진, 그 밖에 인근지역의 섬으로 도주한 동학농민군에 대한 수색 및 체포 작전에 돌입함
1894년 12월 20일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제1중대와 제3중대가 해남에 도착함. 해남에 주둔하던 좌선봉진군은 일본군에게 해남 일대로 도주한 동학농민군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군 1개 지대를 진도로 파견하려 함
1894년 12월 26일 경군(京軍) 30명과 일본군 1개 지대가 진도 벽파진에 상륙하였고, 12월 27일에는 진도읍 내에 도착하여 진도 일대로 피신한 동학농민군에 대한 체포와 처형에 착수함. 이어 12월 30일에 이들은 전라우수영으로 철군함
고증내용
「선봉진정보첩」: 행 진도 도호부사가 첩보합니다(개국 503년 12월 30일). 이 달 26일 경군 영관(京軍領官)이 병정을 거느리고 경내에 들어와서 벽파진참(碧波津站)에서 유숙하고 다음 날 27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무렵 읍참(邑站)에 이르러, 본부의 성을 지키는 군인과 백성들을 모두 헤쳐 보내고 갇혀있는 죄인들을 차례로 취조한 뒤에 손행권, 김윤선, 김대욱, 서기택은 민중 앞에서 죄의 경중을 따라 처단하고, 나머지는 모두 훈방하여 각각 본업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6: 1895년 1월 초 2일. 25일 해남에서 군대를 주둔한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나주에 있을 때에 일본 진영의 지휘로 능주로 파견한 교장 황수옥이 거느린 병사 30명이 장흥을 토벌한 후에 24일 일본 진영 소위와 함께 본 읍에 와서 주둔하다가, 26일 일본 소위와 함께 우수영(右水營)·진도 등지로 갔습니다. 본 진영은 일본대위 마스끼 세이보와 함께 군대를 주둔하고 있으며, 강진·장흥 이하 각 읍의 정황을 실로 명확히 탐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27일 참모관 권종석, 별군관 유석용·이종진 등을 파견하여 2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7: 1895년 1월 초 7일. 진도부사가 보고합니다. 본 고을 진도의 경내의 비류 손행권·김수종 2놈을 잡아 가둔 연유는 접때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에 삼가 읍에서 결단하여 처리하라고 회답하셨거니와, 각별히 더욱 뒤좇아 정탐하여 이방현(李方鉉)·김윤선·주영백(朱永白)·김대욱(金大旭)·서기택(徐奇宅) 등을 추가로 잡아서 모두 우선 엄히 가두고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할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달 26일 경군의 영관이 군대를 거느리고 경내로 들어와 벽파진참(碧波津站)에서 머물러 지냈습니다. 이튿날 27일 진시 경에 읍참에 도착하여 본부의 수성군과 백성을 모두 즉시 파하여 보내고, 갇혀 있는 죄인을 차례로 심문하여 공초를 받은 뒤에 손행권·김윤선·김대욱·서기택은 여러 사람에게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타이르고 풀어주어서 각기 그 본업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