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로고

SITEMAP 전체메뉴

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장성 초토군 이학승 순의비 (장성군 황룡면 내황길)
  • 지 역
  • 전남
  • 주 소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359-1(동학농민군승전기념공원 인근)
  • 문화재
  • 분 류
  • 기타
  • 정 의
  • 황룡촌 전투 당시 경군을 이끈 이학승의 기념비
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3월 20일 고창군 무장에서 1차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고창, 고부, 정읍, 무장, 영광을 석권함. 이후 동학농민군은 4월 16일 함평에 들어 온 후 함평과 무안 일대에서 5일 간 유숙함. 이들 동학농민군은 경군(京軍)이 추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4월 21일 오후 2시경에 함평을 떠나 장성과 나주 쪽으로 진군함
4월 21일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은 영광에 도착하여 총제영(總制營)의 증원군 800명을 기다리고 있었고, 4월 22일에는 이학승(李學承), 원세록(元世祿), 오달영(吳達泳)에게 병력 300명과 대포 2문을 내어주며 장성의 동학농민군 정황을 살피게 함
장성 황룡촌에서의 전투는 4월 23일 오후 2시 또는 4시 경에 시작됨. 경군이 장성 월평에 도착하였고, 월평 인근 황룡촌에 있던 동학농민군과 접전하게 됨. 경군은 우세한 화기가 있었지만, 동학농민군의 완강한 저항에 밀려 경군대관 이학승과 경군 5명이 전사함. 그리고 크루프 소총 1좌, 회선포 1좌와 실탄을 동학농민군에게 빼앗기게 됨
이학승은 1852년생으로 1874년 무과에 합격하여 도판경첨(都判經僉), 장위영 초관 겸 선전관(壯衛營 哨官 兼 宣傳官)을 지냄. 황룡촌 전투에서 전사 당시 나이는 43세였음. 그의 시신은 장성의 향리였던 박전성(朴銓誠)과 김중길(金仲吉)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고 1894년 5월에 한양으로 운구함
비문은 면암 최익현이 지었으며, 비석 앞면에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라 새겨져 있음
고증내용
「갑오사기」: 1894년 4월 15일,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禧, 禧는 羲의 오기)가 경군(京兵) 3,000 명을 이끌고 과연 본읍(本邑)에 와서 머물러 진을 쳤다. 다음 날 무장에서 영광으로 와서 묵고 곧바로 함평에 도착하자 적병은 벌써 나주(羅州)에서 장성(長城)의 황룡강(黃龍江)에 이르러 월평(月坪)에 주둔하였다. 다음 날 경병대관(京兵隊官) 선전(宣傳) 이학승(李學承)이 기병(騎兵) 200 명을 이끌고 뒤쫓아 신촌(莘村)에 진을 치고 맞붙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학승은 전사하였으니 이날은 바로 4월 22일이다. 적의 사망자도 매우 많았다. 적들은 군대가 후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이 각자 제 살기를 도모하여 밤낮을 따지지 않고 이험(夷險)을 가리지 않으며 노령(蘆嶺, 갈재)에서 다시 정읍에 모였다가 며칠이 되지 않아 완성(完城)을 함락시키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감사는 달아나고 도성(都城)은 잃어버려 적의 기세가 더욱 떨쳐졌다. 집들은 불타고 남녀 사상자는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중략)…이때 손화중, 최경선(崔景先, 先은 善의 오기), 홍낙관(洪洛觀, 觀은 寬의 오기), 오중문(吳仲文, 仲文은 勸善의 자) 등이 금성(錦城)을 도륙하고 각 포(包)의 흩어진 무리들을 수습하여 장성의 황룡(黃龍), 나주의 북창(北窓) 등지에 모여 적의 기세가 크게 떨쳐졌다. 그 사이 민생은 도탄에 빠져 아녀자들은 울부짖고 통곡을 하니 차마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양호초토등록」: 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신 홍계훈은 삼가 아뢰오니 장계하여 주십시오. 22일 유시 경 도착한 함평현감 권풍식의 보고 내용에, “저들이 함평으로부터 지금 장성·나주 등지로 향하는데, 소위 원정서(原情書)를 전해왔기 때문에 이에 봉하여 올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원정서를 열어 보았더니 불궤(不軌)의 말이 많으니 실정이 매우 놀랍습니다. 우선 종사군관 이효응과 배은환에게 윤음을 받들고, 이를 저들에게 전하여 타이르도록 보냈더니 이내 소식이 없어서 또 대관 이학승·원세록·오달영에게 병사 300명을 거느리고 장성 등지로 가서 그들의 정형이 어떠한가를 보게 하였습니다. 23일에 군관 장진우와 운량감관 김영태(金永泰)를 법성포에 별도로 파견하여, 기선(汽船)을 타고 내려온 총제영(總制營)의 병사가 육지에 내리면 그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살피게 하였습니다. 또한 종사군관 김낙구·이규문은 중로(中路)에 나아가서 영접하여 오도록 하였고, 이에 신이 주둔한 곳에서 함께 머물게 하였습니다. 동일 포시(晡時, 오후 3∼5시) 경 싸움터에 나간 병사가 황급하게 와서 보고하기를 “우리 군사가 장성(長城)의 월평(月坪)에 도착하자 저들 동학농민군 또한 마침 황룡촌(黃龍村)에 이르러, 차츰 서로 접전하여 한 바탕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우리 측에서 극로백(克虜伯, 크루프 소총)을 한 번 발사하자 저들 중 맞아 죽은 자가 약 수백 명이 되었습니다. 동학농민군 10,000여 명은 악에 바쳐 들고 일어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하여, 30여 리를 쫓아오는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은 관계로 우리 군사는 지쳐 쓰러지면서 창황하게 본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쫓겨 올 때에 대관 이학승이 분발하여 칼을 들고 뒤에서 홀로 싸우다가 병정 5명과 함께 저들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하니, 참혹하고 놀라움이 막심합니다. 극로백 1좌와 회선포(回旋砲) 1좌 및 실탄 얼마는 잃고 말았으니 매우 분하고 한스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양호전기」: 1894년 4월 23일 기사, 23일 미시경에 장성 황룡장터에서 접전하여 저들의 부상자는 7·80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 대관 이학승이 순국하고 장병 4명이 부상을 입고 극로백 1좌와 회선포(回旋砲) 1좌를 잃어버렸으니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저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잠깐씩 합치고 모이니 다만 30,000명이란 숫자만으로 말할 수 없고 읍과 촌마다 내응하는 자가 많습니다.
「동비토록」: 1894년 5월 4일 아침에 초토사. 지난 달 21일에 의정부의 전보에 따라 전교하신 뜻을 선유할 때에, 이효응(李斅應)과 배은환(裵殷煥), 殷은 垠의 오기을 적진에 보냈는데, 여전히 대항하고 말이 무엄한 데에 가까웠으며 2명을 가두었습니다. 그래서 대관을 보내서 군사를 인솔하여 장성땅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서로 싸우는 데에 이르러, 처음에는 적류(賊類) 수백 명을 죽였으나, 끝내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아군이 불리하여, 대관(이학승을 말함)과 효응이 순절하였고 병사 4명이 해를 입었으며, 대포 1좌·회선포(回旋砲) 1좌를 잃어버렸습니다.
「난파유고」 권3 부록: 갑오토평일기. 초토사(招討使) 홍재희가 영광에서 약간의 군대를 보내어 적을 살피게 했는데, 적과 마주쳐서 대관(隊官) 이도승(李道承, 이학승(李學承)의 오기)이 죽고 관군이 패배하였다. 이 날이 4월 22일이었다.
「면암집」: 좌승지에 추증된 선전관 이공의 순의비. 아! 이 장성(長城) 관아의 서쪽 10리에 있는 신현(莘峴)은 선전관(宣傳官) 이학승(李學承) 공이 순절한 곳이다.
사진(4)

영상
드론VR 사진에 마우스를 올려서 움직여보세요
지도
참고문헌
연관 유적지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ㅣ 사업자정보확인 404-82-08587 ㅣ 통신판매업신고 2023-전북정읍-0046호

문화체육관광부 전북특별자치도청

예약하기예약

찾아오시는길오시는길

위로

조직도 조직도

조직도 유족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