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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장성 동학농민군 황룡촌 전투지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 지 역
  • 전남
  • 주 소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356-2 일대
  • 문화재
  • 국가지정문화재(사적) 
  • 분 류
  • 전투지
  • 정 의
  • 1차 기포 후 동학농민군이 경군과 최초 전투를 벌인 곳
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3월 20일 고창군 무장에서 1차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고창, 고부, 정읍, 무장, 영광을 석권함. 이후 동학농민군은 4월 16일 함평에 들어 온 후 함평과 무안 일대에서 5일 간 유숙함. 이들 동학농민군은 경군(京軍)이 추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4월 21일 오후 2시경에 함평을 떠나 장성과 나주 쪽으로 진군함
4월 21일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은 영광에 도착하여 총제영(總制營)의 증원군 800명을 기다리고 있었고, 4월 22일에는 이학승(李學承), 원세록(元世祿), 오달영(吳達泳)에게 병력 300명과 대포 2문을 내어주며 장성의 동학농민군 정황을 살피게 함
장성 황룡촌에서의 전투는 4월 23일 오후 2시 또는 4시 경에 시작됨. 경군이 장성 월평에 도착하였고, 월평 인근 황룡촌에 있던 동학농민군과 접전하게 됨. 경군은 우세한 화기가 있었지만, 동학농민군의 완강한 저항에 밀려 경군대관 이학승과 경군 5명이 전사함. 그리고 크루프 소총 1좌, 회선포 1좌와 실탄을 동학농민군에게 빼앗기게 됨
동학농민군 측의 전사자도 다수 발생했지만, 경군과 싸워서 승리한 전과를 세우게 됨.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장성 월평리로 재집결 하였고, 경군이 재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4월 23일 정읍으로 진군함
고증내용
「남유수록」: 1894년 4월 29일, 이보다 앞서 적이 영광을 함락시키고 바로 장성으로 달려갔는데, 홍대장은 300명의 병사로 하여금 대포를 가지고 적을 탐문하게 하였다. 장성의 화룡시(華龍市, 장성 황룡시의 오기임)에 이르러 홍대장에게 미처 보고하기도 전에 적에게 습격을 받아 사망한 자가 태반(太半)이며 대포까지 빼앗겼다고 하였다. 동학도들은 모두 고깔을 쓰고 염주를 걸었으며 또는 푸른 두건을 쓰거나 왕왕 의복이 번쩍거렸다. 모두 칼을 쥐고 포(砲)를 가지고 있었다. 죄가 있는 자는 잡아다가 죽였고, 군대를 만나면 바로 살해했다고 한다.
「갑오사기」: 1894년 4월 15일,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禧, 禧는 羲의 오기)가 경군(京兵) 3,000 명을 이끌고 과연 본읍(本邑)에 와서 머물러 진을 쳤다. 다음 날 무장에서 영광으로 와서 묵고 곧바로 함평에 도착하자 적병은 벌써 나주(羅州)에서 장성(長城)의 황룡강(黃龍江)에 이르러 월평(月坪)에 주둔하였다. 다음 날 경병대관(京兵隊官) 선전(宣傳) 이학승(李學承)이 기병(騎兵) 200 명을 이끌고 뒤쫓아 신촌(莘村)에 진을 치고 맞붙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학승은 전사하였으니 이날은 바로 4월 22일이다. 적의 사망자도 매우 많았다. 적들은 군대가 후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이 각자 제 살기를 도모하여 밤낮을 따지지 않고 이험(夷險)을 가리지 않으며 노령(蘆嶺, 갈재)에서 다시 정읍에 모였다가 며칠이 되지 않아 완성(完城)을 함락시키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감사는 달아나고 도성(都城)은 잃어버려 적의 기세가 더욱 떨쳐졌다. 집들은 불타고 남녀 사상자는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중략)…이때 손화중, 최경선(崔景先, 先은 善의 오기), 홍낙관(洪洛觀, 觀은 寬의 오기), 오중문(吳仲文, 仲文은 勸善의 자) 등이 금성(錦城)을 도륙하고 각 포(包)의 흩어진 무리들을 수습하여 장성의 황룡(黃龍), 나주의 북창(北窓) 등지에 모여 적의 기세가 크게 떨쳐졌다. 그 사이 민생은 도탄에 빠져 아녀자들은 울부짖고 통곡을 하니 차마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임하유고」: 4월 초7일, 홍계훈이 경군(京軍) 1,500명을 이끌고 전주에 도착하자 진을 치고 머물러 있던 동학도(東學徒)가 영광(靈光), 무안(務安), 함평(咸平)으로 달아났지만 나주(羅州)에서는 매우 견고하게 성을 지키고 있어 감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초토사가 뒤이어 영광읍에 도착해서 경군 30명을 보내 동학의 거처를 정탐하게 하였다. 동학의 전군(全軍)과 장성(長城) 화룡시(華龍市, 황룡의 오기)에서 만나 경군이 대포를 쏘아 수 백 명의 동학들을 죽이고 경군은 7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경군이 본진으로 돌아오자 동학도는 장성을 경유하여 다시 전주로 향하였다.
「갑오약력」: 이때 동도는 장성 등지에 주둔해 있었음. 이때, 동도는 장성(長城) 등지에 주둔해 있으면서 전라좌도(左道)의 무리와 합세하여 수만의 무리에 이르렀다. 관군이 추격하여 장성의 황룡장터에[月坪 앞] 이르러 적과 만나 여러 차례 혼전(混戰)을 하다가, 관군이 불리하여 회선포(回旋砲) 수 문(門)을 빼앗겼다. 동도는 관군을 버리고 곧장 전주로 향하여 성을 함락하였다.[이것이 4월 27일이다.]
「양호초토등록」: 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신 홍계훈은 삼가 아뢰오니 장계하여 주십시오. 23일에 군관 장진우와 운량감관 김영태(金永泰)를 법성포에 별도로 파견하여, 기선(汽船)을 타고 내려온 총제영(總制營)의 병사가 육지에 내리면 그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살피게 하였습니다. 또한 종사군관 김낙구·이규문은 중로(中路)에 나아가서 영접하여 오도록 하였고, 이에 신이 주둔한 곳에서 함께 머물게 하였습니다. 동일 포시(晡時, 오후 3∼5시) 경 싸움터에 나간 병사가 황급하게 와서 보고하기를 “우리 군사가 장성(長城)의 월평(月坪)에 도착하자 저들 동학농민군 또한 마침 황룡촌(黃龍村)에 이르러, 차츰 서로 접전하여 한 바탕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우리 측에서 극로백(克虜伯, 크루프 소총)을 한 번 발사하자 저들 중 맞아 죽은 자가 약 수백 명이 되었습니다. 동학농민군 10,000여 명은 악에 바쳐 들고 일어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하여, 30여 리를 쫓아오는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은 관계로 우리 군사는 지쳐 쓰러지면서 창황하게 본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쫓겨 올 때에 대관 이학승이 분발하여 칼을 들고 뒤에서 홀로 싸우다가 병정 5명과 함께 저들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하니, 참혹하고 놀라움이 막심합니다. 극로백 1좌와 회선포(回旋砲) 1좌 및 실탄 얼마는 잃고 말았으니 매우 분하고 한스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1894년 4월 24일)
「양호전기」: 1894년 4월 23일 기사, 23일 미시경에 장성 황룡장터에서 접전하여 저들의 부상자는 7·80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 대관 이학승이 순국하고 장병 4명이 부상을 입고 극로백 1좌와 회선포(回旋砲) 1좌를 잃어버렸으니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저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잠깐씩 합치고 모이니 다만 30,000명이란 숫자만으로 말할 수 없고 읍과 촌마다 내응하는 자가 많습니다.
「양호전기」: 1894년 4월 29일 을해, 금영에서 대내에 전보하기를, “23일 장성 황룡장 전투 후에 저들은 장차 순창(淳昌)·담양(潭陽)·나주 등지로 향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함평으로 쫓아가려고 하였으나, 완영을 지키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되어 25일에 군사를 돌려 전주로 향했습니다.
「동비토록」: 1894년 4월 30일 초토사 홍계훈. 공사청에, “23일에 황룡장(黃龍場)에 도착한 뒤에, 저들이 나주 등지로 향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추격하려고 했으나 저들은 간사한 꾀가 많고 완영을 지키지 못할 것이 염려되어 25일에 회군하여 전주로 향했는데, 저들이 장성 갈치(葛峙), 갈재를 경유하여 먼저 완영으로 향하였습니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권: 1894년 4월, 5월 承政院 開拆, “…(전략)…23일에는 軍官 蔣鎭宇와 運糧監官 金永泰를 法聖浦에 따로 보내 輪船으로 내려하는 總制營 병정의 下陸과 공궤하는 일을 살피게 하였으며 또 從事軍官 金洛龜·李奎文으로 하여금 중도에서 영접하여 와 신의 駐陣處에 함께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저녁 무렵에 출진한 병정들이 황망히 달려와 보고하기를 “我軍이 막 長城月坪에 당도하였을 때 저들도 마침 黃龍村에 도착하여 점점 서로 접전하다가 一場의 廝殺이 벌어졌는데, 그들에게 걸리버 총註 1_0을 한번 쏘자 포환에 맞아 죽은 자가 수백 명에 이르러, 저들 만여 명이 악에 바쳐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와서 앞을 막는지라 30여 리를 쫓고 쫓기다가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기 때문에 아군은 피곤하여 전도하면서 창황히 진으로 돌아왔으나, 한참 추격을 당할 때에 대관 이학승이 뛰쳐나가 칼을 들고 홀로 후방을 맡다가 병정 5명과 더불어 저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니 참담하기 그지없사오며 克虜伯 1坐와 回旋砲 1坐 및 탄환 약간도 잃었으니 또한 매우 분통한 일입니다.
논저
논문명(서명) 저자/필자 발행연도 쪽수
「동학농민전쟁과정에서 나타난 장성전투의 의미」 이이화 1995
「제1차 동학농민전쟁 시기 농민군의 진격로와 활동양상」 배항섭 2002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손화중의 지역적 기반과 활동」 정성미 2017
이상식 외 1996
사진(4)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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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참고문헌
연관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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