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3월 20일 무장기포 후 동학농민군은 무장을 시작으로 전라도 각지를 석권하기 시작함. 함평에 동학농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894년 4월 16일 경군이 영광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함평으로 이동함
4월 16일 오후 4시경 함평에 도착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6~7,000여 명임. 이들은 깃발을 들고 동헌으로 쳐들어가 수성군을 제압한 후 함평관아를 점령함
함평에 주둔했던 농민군은 같은 해 4월 21일 오후 2시경에 경군이 추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장성과 나주 방향으로 이동함
함평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인물은 대접주 이화진(李化辰)을 비롯하여 김경옥(金京玉), 이춘익(李春益), 이재민(李在民), 이곤진(李坤辰), 김성필(金成必), 김인오(金仁五), 김성오(金成五), 김성서(金成西), 노덕휘(魯德輝) 등이 있음
고증내용
「취어」: 선무사가 다시 장계함(宣撫使 再次狀啓). 하나, 동면(東面) 관리(官里)의 장리들이 기록하여 보고한 내용에는 초 2일에 돌아간 사람은 전라도에는 함평(咸平), 남원(南原), 순창(淳昌), 무산(茂山), 태인(泰仁), 영광(靈光) 등의 지역 사람이 200여 명이고, 경상도에는 성주접(星州接)이 30여 명, 선산접(善山接)이 30여 명, 상주접(尙州接)이 90여 명이고, 충청도 도내에는 옥천접이 30여 명, 영동접(永同接)이 50여 명입니다.
「갑오사기」: 4월 10일. 적병(賊兵)이 영광(靈光)에서 함평(咸平)으로 내려와 머물렀다.
「갑오사기」: 4월 15일.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禧, 禧는 羲의 오기)가 경군(京兵) 3,000 명을 이끌고 과연 본읍(本邑)에 와서 머물러 진을 쳤다. 다음 날 무장에서 영광으로 와서 묵고 곧바로 함평에 도착하자 적병은 벌써 나주(羅州)에서 장성(長城)의 황룡강(黃龍江)에 이르러 월평(月坪)에 주둔하였다.
「난파유고」 권3 부록: 갑오토평일기. 동괴(東魁) 전봉준(全奉準)이 연달아 흥덕(興德)·고창(高敞)·장성(長城)·무장(茂長)·영암(靈岩) 등의 군들을 함락시켰다. 함평읍(咸平邑)에 근거하여 마치 유린하고 몰아가는 것처럼 나주로 쳐들어올 기세였다. 나주의 공형(公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글의 뜻이 매우 패악하고 오만하였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8권: (6) 東學黨事件에 대한 會審顚末 具報(1895년 09월 02일). 같은 해 4월 상순에는 봉준이 직접 그 무리를 인솔하고 전라도 무장에서 일어나, 고부, 태인, 원평, 금구 등지로 갔다. 이때 전라감사의 포병 일만여 명이 동학도를 정토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일단 고부로 퇴각, 이곳에서 이들 포병과 교전하기를 낮과 밤 온종일을 싸워 드디어 이를 격파하였다. 나아가서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거처 장성에 도착하여 경성에서 파견된 군대 700여 명과 만나 역시 이를 격파하였다.
「선봉진정보첩」: 함평현감이 첩보합니다(개국 503년 12월 초6일). 본현(本縣)의 동학 괴수(東學魁首) 이화진(李化辰)을 포살한 일과 수종(隨從) 6명을 잡아 가두고 처분을 기다리는 연유를 어제 이미 치보(馳報)하였거니와, 같은 날 이른바 소위 접주(接主)인 김경오(金京五), 이춘익(李春益), 이재면(李在冕), 이곤진(李坤辰), 김성필(金成必), 김인오(金仁五), 김성서(金成西), 노덕휘(魯德輝) 등 8명도 또한 잡아서 포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