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봉평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북접 교단의 기포령이 내려진 이후인 1894년 9월 말부터였다. 홍천의 차기석 휘하에 있던 윤태열(尹泰烈) 등이 농민군을 모으고 창고 옆에 목채를 세워 도소를 마련한 다음 각 촌으로 전령을 보내 군량 등을 거두어들였다.
강릉부사 이회원(李會源)은 1894년 10월 22일에 군정을 징발하여 중군(中軍) 출신 이진석(李震錫) 등에게 관군과 민보군 150명을 인솔해 가서 봉평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10월 26일 이들이 봉평에 도착하자 이미 봉평에 살던 강위서(姜渭瑞)가 민보군을 모집하고 농민군을 공격하여 윤태열 등 13명을 체포해두고 있었다. 중군 이진석은 이 가운데 봉평에서 체포되었던 윤태열과 이창문(李昌文), 김대영(金大永), 김희열(金喜烈), 용하경(龍河京), 오순영(吳順永), 이화규(李和奎) 등 7명을 포살하였다. 11월 2일에도 농민군을 추격하여 정창해(鄭昌海)를 총을 쏘아 죽였고, 안영보(安永甫)와 김순복(金順卜) 2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대해 홍천의 차기석이 봉평을 쳐들어가 도륙을 내려한다는 소문이 돌자 관군과 민보군은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게 된다.
그러나 평창과 정선 등지의 동학농민군 진압이 시급해지자 관에서는 홍천농민군에 대한 공격은 강위서 등에게 맡기고 이진석이 이끌던 군병은 대화로 가서 감영의 중군이 이끌고 온 관군과 합친 후 1894년 11월 3일에 도착한 일본군과 합세하여 11월 5일 평창 후평동에서 농민군을 진압하고 다음 날 정선으로 가서 정선읍내와 여량 등지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봉평에 남은 민보군 지휘자인 강위서는 1894년 11월 6일경 신배령을 넘어 홍천 내면으로 들어갔다가 차기석 부대의 기습을 받고 봉평으로 패주하였다. 11월 10일경 다시 홍천으로 넘어가서 양양에서 온 이석범(李錫範), 홍천 유생 허경(許埛)이 이끄는 민보군 등과 함께 내면 일대에서 차기석이 이끌던 농민군을 진압한 후 11월 중순경 다시 봉평으로 돌아와 흥정(興亭)리 등지의 농민군을 공격하여 임정호(林正浩) 등 38명의 농민군을 포살하고 100여명을 체포하였다.
봉평면 무이리에 살던 이광섭옹(1990년 당시 72세)이 그의 조부(이명화, 1864년생)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사리평 전투는 창동 북쪽 회령봉과 흥정산 일대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 600여 명과 창동 쪽에 병력을 집결해 있던 관군 및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다고 하였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도 일본군이 총을 쏘자 화승총 2자루 밖에 없던 농민군들이 놀라 구목령을 넘어 홍천 서석 방면과 횡성의 태기산 쪽으로 도주한 것으로 기억하였다. 그러나 관군이나 일본군, 민보군이 남긴 자료에는 사리평 전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정황상 사리평 전투는 이진석이 이끄는 강릉의 민보군이 도착하기 전 강위서가 지휘하던 포군과 봉평의 농민군 사이에 벌어진 격전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