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내용
「순무선봉진등록」 제7: 1895년 1월 초 10일. 초 6일에 아무런 사고 없이 머무른 사정은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나주에 머물고 있는 일본의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의 서통(書通)에 따라 초 7일 진시 경에 해남에서 출발해 30리를 가서 별진참(別津站)에 도착하여 머물렀고, 일본 1중대 마스끼 세이보는 그대로 해남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초 8일 유시 경에 50리 되는 영암읍(靈巖邑)에 도착하니 일본 3중대 이시구로 고세이와 교도 중대장 이진호의 두 부대가 강진으로부터 먼저 읍 밑에 도착하여 아무런 사고 없이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 같은 날 영암군에 발송한 감결(甘結靈巖郡 同日). 해남(海南)의 군민(軍民)들이 지금 비적의 괴수를 붙잡는 때에 본군 경내에서 불법을 저지르는 최필기(崔必奇)와 강진(康津) 및 본군 등지에서 불법을 자행하는 양씨아적(梁氏阿的) 두 놈을 비곡면(比谷面) 별진역(別津驛)에서 붙잡아 대기시키고 있다니, 즉시 안율(按律)해야 한다. 열읍(列邑)에서 소란을 피운 이와 같은 비적의 괴수를 아울러 다른 경내에서 안율하면 당해 경내에서 곤욕을 당한 백성들이 분을 풀 수 없기 때문에 이에 죄인을 압송해 넘기니, 엄히 핵실하고 상세히 조사해서 기어이 실정을 얻어내고, 즉시 안율한 뒤에 보고해 올 것이며, 양씨 놈은 분명 강영(康營, 강진 병영)에서 놓친 죄인이라고 하니, 이것을 병영(兵營)에 매보(枚報)하고 압송한 뒤에 보고해 오도록 할 것.
「선유방문병동도상서소지등서」: 1895년 1월 8일. 영암 비곡면(比谷面) 별진역(別津驛)의 역장(驛長) 등이 아룁니다. 본역(本驛)은 두 영(營)의 요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비도(匪徒)들의 난리가 있은 뒤로 왕래하는 관예(官隷)들에게 갖가지로 침책(侵責)을 당하여 지응(支應)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