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장흥과 강진 일대에 동학이 처음 전파된 것은 장흥군(현 보성군) 웅치면 강산리의 박병락(朴炳樂) 부부(부인, 文方禮)가 입도한 1864년임. 이 지역에서 동학교도가 급증한 때는 이인환(李仁煥), 이방언(李邦彦), 문남택(文南澤) 등이 입도한 1891년 이후임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흥과 강진지역의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은 대접주 김병태(金炳泰), 접주 남도균(南道均), 안병수(安炳洙), 윤세환(尹世煥), 윤시환(尹時煥), 장의운(張儀運), 조병길(曺秉吉), 강운백(姜雲伯), 김옥일(金玉一), 신오삼(申五三), 이세화(李世和), 김종태(金鍾泰), 김관태(金寬泰) 등이 있음
이들은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 1893년 1월의 광화문 복합상소, 같은 해 3~4월 열린 보은, 금구집회에도 참여함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이후인 1894년 6월경 장흥 동학농민군의 규모는 약 7,000명이었고, 강진 동학농민군은 3,000여 명이었을 것으로 추산됨. 장흥과 강진일대의 동학농민군은 이방언, 이인환, 구교철, 이사경을 비롯한 많은 접주들의 지휘 하에 있었고,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에도 합류함
전주화약 체결 이후 1894년 6월 19일에는 강진 동학농민군은 강진읍을 점령하여 속인전(俗人錢)이라는 명목으로 세를 거두었고, 7월 초에는 폐정개혁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임. 강진의 집강소는 1894년 10월 강진현 이교(吏校)들이 수성소(守城所)를 설치할 때까지 지속됨
이후 강진관아의 수성소는 1894년 12월 벽사역, 장흥성을 함락시킨 동학농민군의 협공으로 12월 7일 함락되었고, 이때 수성군 도총장이었던 김한섭(金漢燮)과 그의 제자를 비롯한 여러 명이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전사함
고증내용
「영상일기」: 1894년 5월 18일. 이보다 앞서 비류가 강진에 주둔해 모인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런데 홍장(洪將, 홍계훈)이 전라감영을 근거로 삼아 불우한 사태를 대비하고자 하였다. 재신인 민영준(閔永俊, 泳駿의 오자)에게서 지시를 받게 되어 전주에서 출발해 강진으로 추격했는데 강진병영(康津兵營)에 이르기도 전에 적병이 이미 전주를 함락시켰다고 한다.
「갑오실기」: 갑오년 12월 27일.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병사(全羅兵使) 서병무(徐丙懋)의 등보(謄報)를 보니, ‘비적(匪賊)이 더욱 만연하여 이 달 4일 장흥부(長興府)를 함락하고 7일 강진현(康津縣)을 함락하고 10일 병영(兵營)을 침범하여 군사와 백성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죽었으며 장흥부사(長興府使)와 병마우후(兵馬虞候)도 모두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연파집」: 김오남을 애도하는 글(哭金吾南文).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것이 진실로 선비의 절개이다. 지금 동도(東徒)가 크게 일어나서 감히 반란을 도모하니 당연히 분발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서지 않을 것을 맹서한다”고 하고, 바로 의로운 선비 수백명과 읍에 들어가서 성(城, 강진)을 지켰는데, 의(義)로써 사람들에게 맹서하고 군률(軍律)로써 병사를 훈련시켰으나 시운(時運)이 불행하여 고립된 성이 끝내 적에게 함락되어 칼날이 서로 마주할 때에 조용히 의(義)에 나아가 죽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초 9일. 저들이 오늘 사시 경에 강진현(康津縣)에 침입하여 인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을 사살하고 칼로 찌르니, 이곳 백성들이 울고 도망치는 일을 보발(步撥)로 급히 보고하여 왔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초 10일. 비류가 강진현을 침입한 사정은 어제 이미 파발마로 급히 공문을 보내었거니와 비류가 어제 축시 경에 각처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현재 세 갈래 길로 병영을 침입하려 합니다. 그런데 장흥부와 강진현이 함락되어 군대를 징발할 길이 없으므로 영암군(靈岩郡)에 포군을 징발하는 명령을 내리고 파발마로 재촉하기를 이미 8,9차례나 하였는데도 기롱만을 일삼고 서둘러 보내지 않으니 패배의 우려가 당장 닥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