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강릉부를 점령했다 퇴각한 농민군은 9월부터 10월까지 평창.정선을 점령한 상태였다. 강릉부를 다시 점령할 계획을 세운 평창.정선의 농민군은 보수 민보군의 반격과 11월 3일 파견되어 내려 온 원주 순영중군과 일본군과 맞서야 했다. ‘민보군’의 성격이 강한 지방 토벌군에 비해 이들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훈련된 군대였다. 일본군은 전라도.충청도의 농민군이 강원 함경도 쪽으로 도주하는 것을 차단하고 전라도.충청도의 농민군을 서남방면으로 몰아붙여 포위하려는 방책으로 강원도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11월 5일 농민군 1만여 명은 평창에서 지방의 포군, 순영 중군,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 으나 100여명이 희생당하고 흩어졌다. 평창에서 패배한 농민군 가운데 수백명은 대오를 이루어 영남지방으로 떠났다.
고증내용
정선과 평창에 정탐을 따로 파견했는데, 그 보고에 의하면 “정선읍에 모인 비도는 3000여 명이고, 평창의 후평에 모인 비도는 1000여 명으로 기세가 대단하여”(<동비토론>,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 4, 404쪽)
순영에서 따로 순영중군도토포사를 정해 병정을 이끌고 일본군 2개 중대와 함께 이 달 3일 에 운교참에 이르렀다. 읍의 포군 800명을 대화참에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어제 신시에 영서의 유진중군으로 하여금 정해진 숫자대로 병정을 이끌고 와서 협력하여 정선과 평창 등지의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동비토론>><<국역총서>>4, 413쪽)
이달(11월) 5일에 평창.후평 등지에서 동학 10,000 명과 싸워 비도 100여 명을 쏘다 죽였고, 연이어 접주 이문보 등 5명을 잡아서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하였으며 정선 등지로 추격하여 들어갔다고 한다(<동비토론>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 430쪽)
소모관 정준시가 첩보합니다. 11월 1일에 본 순영 중군과 함께 포군과 일본 병사들을 이끌고 원주를 떠나 횡성 강릉을 거쳐 11월 5일에 평창에 이르러서 비류 1만여 명과 맞닥뜨렸습니다. 오시부터 신시까지 악전고투 속에 적병 1백여 명을 사살하였고, 남은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 어져 달아나 숨었습니다(<갑오군정실기><<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7, 166쪽)
12월 1일(음력 11월 5일) 평창에 집결한 약 3000여 명의 동학당을 공격했다. 동도가 사격으로 저항하여 격전 2시간에 점차 퇴각의 기세를 나타내서 오후 1시에 평창을 완전히 점령했다. 동도의 대부분은 전선 방면으로 퇴주했다. 동도의 사상과 포로는 즉사 70명, 부상 미상, 포로는 뒤에 저항하므로 10여 명을 총살했다. 오늘은 지방 부근을 수색하여 뿌리뽑고 내일은 정선과 영월로 향하려고 한다“(이시모리 대위의 12월 8일자(음력 11.12일) 보고.